중견 그룹 주력사에서 근무하는 장 과장(35)은 스스로 생각해도 평범한 소시민이다. 버는 게 적으니 어떻게든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한두푼에도 ‘목숨’을 건다. 점심은 항상 구내 식당에서 먹는다. 메뉴를 거의 외울 정도다. 커피전문점에서 자기 돈 내고 커피를 마신 기억이 거의 없다. 몇백원이면 마실 수 있는 회사 자판기 커피와 맛 차이도 잘 느끼지 못하겠단다.
저녁 약속도 어지간하면 피한다. 상사나 선배면 얻어 먹는 것이 그리 부담스럽진 않지만 동료, 친구, 후배들과의 자리는 ‘돈’ 신경을 써야 하니 영 불편하다. 자기 먹은 값만 내고 일어서기는 뒷통수가 뜨겁고, 누군가 밥값을 낸다고 해도 자기가 2차 맥주를 사야한다는 부담이 생기고, 술자리가 길어지기라도 하면 중간에 도망갈 수도 없고……그래서 20대 때는 ‘잘 놀았던’ 그도 저녁시간이면 외톨이가 된다. 학원간다, 동창회다, 집안 행사다 이제 더 댈 핑계도 없다.
비슷한 규모 다른 회사에서 근무하는 이 차장(38)은 장 과장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라는 말이 늘상 입에 붙어있다. 한번을 먹어도 좋은 사람들과 그럴듯한 곳에서 맛있게 먹자는 주의다. 커피도 스타벅스 등 전문점에서 마셔야 대화 수준이 달라진다고 믿는 그다.
외근 부서가 아닌데도 점심, 저녁 약속이 꽉 잡혀있다. 자주 못 본 후배, 신세를 진 다른 부서 동료, 입사 동기들과의 약속을 미리미리 잡아 놓기 때문이다. 선배들도 그의 ‘관리 대상’에 들어있다. 대신 “저녁만 맛있게 먹고 헤어진다”는게 그의 원칙이고 상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지간해선 2차로 자리를 옮기지 않는다. 평일엔 거의 매일 외식을 하는 셈이지만 가족들도 별 불평이 없다. 저녁을 차릴 필요가 없고, 그렇다고 아주 늦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예의 두 사람 가운데 어떤 스타일인가? 지나친 단순화이긴 하지만, 우리 직장인들의 씀씀이는 이 두 사람의 범주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는다. 요약하면, 경제적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회적 망신을 감수하느냐(장 과장) 아니면 좀 부담이 되더라도 네트워킹에 투자하느냐(이 차장)다.
많은 이들이 경기침체와 그에 따른 실질소득 감소 때문에 장 과장과 같은 길을 ‘할 수 없이’ 걷고 있다. 이 차장 처럼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다 ‘밥을 먹이는’ 일은 마음은 있어도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다행히 요즘은 모두들 서로 사정을 잘 아는 처지라 그렇게 부끄러울 일도 없다.
크게 보면 사회적 추세와도 맞다. 부서 회식 빈도가 줄고, 퇴근하면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예전에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자”는 인사를 남발했던 호기롭던 직장인들이 이제는 “삶이 그대를 속이는”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장 과장처럼, 고개를 숙이고 살아서는 직장 사회에서 절대 최고가 될 수 없다는 엄연한 현실이다. 직장 사회에서의 출세는 수년간 열심히 공부해 합격하면 자격증을 주는 시험제도가 절대 아니다.
사장이 되려면 임원일 때 혁혁한 성과를 올려야 한다. 그에 앞서 임원이 되기 위해선 중견 간부일 때 리더십을 보이고 차세대리더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런 중견간부가 되려면 사내에서 두루 실력을 인정받고 엘리트로 부상해야 한다. 그것도 선,후배,동료들이 인정하고 이 부서 저 부서에서 고개를 끄덕여주는 인재가 돼야 한다.
입사 초기, 늦어도 초급 간부 때부터는 두각을 드러내고 회사내 여러 부서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야 한다. ‘실력’으로도 그래야 하지만 두루두루 교류하면서 알리는 노력도 해야 한다. 출퇴근 시간을 엄수하고 맡은바 직무를 다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장 과장 처럼 혼자 밥먹고 커피 마시고 술자리에선 보이지도 않는 이가 ‘실력을 인정받아’ 어느날 갑자기 기획부장이 되고 상무,전무,사장이 되는 ‘급행열차’를 타는 경우란 거의 없다. 남에게 밥을 사지 않아서가 아니다. 회사 다른 부서 사람들과 두루 교류하는 경험은 물론 자신의 생각, 비전, 실력을 알릴 기회를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 다 엇비슷한 재능을 갖고 있다면, 예의 장 과장과 이 차장 중 직장 사회의 리더로 발돋움할 가능성이 높은 사람은 그러니까 바로 이 차장이다. 장 과장은 생활에 쪼들려 자기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낙오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런 것들이 개인의 성격탓이면 할 말 없다. 그러나 경제적 이유, 즉 돈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면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다. 좋은 과외를 받은 부자집 아들이 일류 대학에 들어가듯, 집안 사정이 좋은 직원들만 훨씬 앞서나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익부 빈익빈…
그러니 다시 생각해야 한다. ‘돈 때문에’ 후배들 고민도 못들어주고, 돈 때문에 다른 부서 사람과 사귈 기회도 갖지 못하고, 돈 때문에 선배 모시고 한 수 지도 받을 기회도 못 갖고, 돈 때문에 유명해질 기회를 놓친다면 정말 억울하지 않은가.
당신이 사장이 되고 싶다면, CEO가 되고 싶다면 밥을 사는 사람이 되라! 빚을 내서라도 밥을 내는 사람이 되라!
왜 밥을 얻어먹는 사람이 아니라 밥 사는 사람이 돼야 하는가. 밥이건 무엇이건 내는 사람은 초대받은 사람에 비해 훨씬 유리한 조건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우선, 내는 사람은 상대를 고를 수 있다. 좋아하는 사람, 호감가는 후배, 나중에 덕볼 것 같은 선배만 고를 수 있다. 반대로 ‘호출’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선택받아야 한다.
또 내는 사람은 자신이 대화를 주도할 수 있다. 호스트로서의 권한이다. 상대는 아무리 작은 초대라도 그 값을 치르고 싶어한다. 당신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준다는 얘기다.
여기다 내는 사람은 상대에게 ‘자연스럽게’ 부채감을 준다. 다음에는 상대방 차례라는 사회적 약속이 성립한다.
물론 밥한번 내는 것으로 ‘동지’를 얻을 순 없다. 그러나 그렇게 밥을 냄으로써 자기가 상대방의 동지가 될 의사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 밥 한 번 사는 것도 정치적인 행동이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뿐만 아니다. 다른 부서의 다양한 계층과 만남으로써 사내 정보에 밝아질 수 있고, 자기 하는 일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평일 저녁 한 두번 먹는 것만으로 이렇게 얻는 것이 많다. 이 차장이 15년뒤 사장이 될 꿈을 갖고 있다면 이 투자는 필수불가결하다. 그리고 지금부터 직장생활을 마칠 때까지 그 효과는 지속될 것이다.
이 차장이 장 과장 보다 얼마나 더 쓸까? 그가 남 밥 사는데 드는 돈은 작게 보면 한달에 40만원 내지 50만원을 밥사는데 쓸 경우 1년에 5백만원 정도 밖에 안된다. 이 차장은 장 과장 보다 1년에 5백만원 정도를 더 투자하고 이런 귀한 것들을 얻는다. 반대로 보면 장 과장은 5백만원 때문에 이런 것들을 못하고 주눅들어 산다. 당신은 누구의 길을 따를 것인가.
세상에 공짜는 없다. 남들이 실컷 투쟁하고 운동할 때 먼발치에 구경만하고 있다가 세상이 바뀌면 무임승차 하는 사람들이 입는 혜택을 공짜 점심(free lunch )이라고 부른다. 정말 공짜 일까? 그런 사람들도 무임승차했다는 자괴감이 있고 역사 형성에 주인공이 못됐다는 피해의식을 갖고 산다. 얻어먹은 것은 언젠가 값을 해야 한다.
CEO가 되고픈 당신은 그러니까 이제 구경하지 말고 뛰어들고 이름을 걸고 저질러야 한다. 무임승차자들이 당신에게 부채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당신은 리더가 될 수 있다. 공짜점심이든 저녁 밥이든 내는 쪽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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