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는 사람을 이끌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가, 아니면 교육과 훈련 혹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가. 한가로운 논쟁거리 같지만 경영대학 리더십 과목의 첫 강좌는 바로 이 주제다. 그리고 학자들 마다 의견도 분분하다. 필자는 리더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고 생각한다. 이미 설명한 대로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동참하게 할만한 목표를 찾아내는 작업이 리더십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물론 타고난다고 할만한 요소도 분명히 있다. 바로 “앞에 나서려는 마음가짐”이다. 갑자기 과제가 떨어졌을 때 망설임없이 자기가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일단 발을 빼고 보는 이들도 적지 않다. 경쟁자들끼리 모인 입사면접 대기장에서도 먼저 말문을 여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렇게 ‘남들 앞에 앞장서고 싶어하는’ 정도의 성격은 타고나야 리더십을 개발할 동기도 쉽게 찾고 또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습득할 수 있다.

리더십이 누구라도 개발할 수 있고 발휘할 수 있는 ‘기술’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런 ‘재주’만 갖고는 사람을 이끌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위 “뺀질뺀질한” 사람, “자기 이익만 챙기는” 스타일, “말을 자주 바꾸는” 인물, 또는 “소신없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이, “결정적일 때 책임을 지지 않는” 상사 등의 경우는 아무리 그럴듯하고 대의명분이 있는 목표를 내걸더라도 다른 이들의 ‘자발적인’ 동참을 이끌어내기 어렵다. 그럴듯한 말재주와 분위기 조성으로 한두번 남들을 현혹할 수는 있으나 금방 그러나게 돼있다.

그러니 리더가 되고 싶은 사람은 혹 자신이 남들에게 이렇게 비치지 않고 있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사람 사이의 일들은 의외로 ‘하찮은’ 것들에서 평가되는 경우가 많다. 지인 중 한 사람은 삽겹살을 같이 먹을 때도 상대방이 남을 배려하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두 같이 맛있게 먹기 위해 남앞에 있는 고기까지 뒤집어 주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남이 그렇게 뒤집는 것만 기다리다 먹은 사람도 있다는 얘기다.

특히 직장 생활을 제로섬(zero-sum) 게임,즉 누군가 이득을 보면 반드시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시스템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한 이 때, 직장에서의 모든 일상은 삼겹살 먹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손해를 볼 줄 아는 사람, 남의 것까지 뒤집어 줄 수 있는 사람이라야 그가 남 앞에 나설 때 사람들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도덕적 행위를 ‘작위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희생이 필요함을 생각할 때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이 반드시 갖추어야 덕목은 적지 않다 하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 바로 ‘믿음성’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목표와 솔깃한 인센티브를 내걸어도 그 약속이 언제 없었던 일이 될지도 모를 인물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사람은 없다. 그 목표 자체가 의심 받는다. 목표가 확실히 지켜질 것이 분명할 때 사람들은 헌신할 수 있다.

믿음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아는 것을 터놓고 공개하는 것이다. 부서 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밝히는 것이다. 여기선 ‘선의의 거짓말’도 피하는게 좋다. 실제 사내 정치꾼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 ‘과장된 폭로’다. 여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부서원들에게 모든 것을 공개하고 정보를 공유하는 게 낫다.

믿음성은 책임의 문제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잘한 것은 자기 덕이요, 못한 것은 부하 탓이요 하는 책임전가형 상사에게 부하는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는다. 부하가 잘하려다 실수한 일에 대해 자신이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상사는 ‘윗쪽’에 찍히는 흠집을 남길지 몰라도 ‘아랫쪽’의 신망을 얻게 된다. 리더는 철저히 아래와의 인터액션이다.

또 하나 빠뜨릴 수 없는 것이 공평무사 혹은 공명정대한 태도다. 사심없이 대하고 원칙을 갖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추종자들을 차별대우하거나, 이 일 저 일 다른 기준을 갖다대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한다.

필자는 여기다 ‘관심’을 추가하고 싶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축구선수라도 골을 넣으면 감독에게 먼저 달려간다. ‘인정’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다. 장성한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사랑은 어른으로서 인정해주는 것이다. 추종자는 본질적으로 “남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다음에는 자신도 리더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리더로 부터 확인받으면 불만은 사그라진다. 칭찬이나 동기부여는 관심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리더 혹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기술로만 된다면 우리는 수많은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출현을 막을 길이 없다. 직장 사회에서도 천부적인 재간을 가진 정치꾼들이 권좌를 잡을 것이다. 그러나 직장 사회가 아무리 이익사회라도 그 구성원들은 마음을 가진 인간이다. 마음을 움직이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상사라는 권위로, 인사고과라는 무기로 부하들을 쪼아가며 실적을 올릴 수는 있다. 또는 무형 유형의 ‘당근’을 약속하며 헌신을 끌어낼 수도 있다. 실제로 많은 ‘유능한’ 경영자나 관리자들이 이런 방법을 택해 리더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부하 직원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면 이는 단기적인 성과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작은 성공은 가능해도 큰 성공을 기약하지 못한다. 당신도 똑 같이 어려운 일을 하면서 함께 걷고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줄 때 사람들은 당신 뒤를 따른다.

그러니까 리더십의 자질을 얘기하자면 카리스마나 통솔력, 뛰어난 언변 등 우리가 당연시 했던 리더십 덕목 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품성이 훨씬 중요해진다. 이건 억지로 기른다고 금방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회사 생활을 통해 더 높은 것, 더 중요한 것,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을 자기 개인을 위한 것 보다 더 신경을 쓸 때 점진적으로 쌓이는 것이다. 방법은 역시 겸허한 자기 반성과 수양이다.

리더십을 천착하다보면 우리는 이미 오래된 헌책장 같이 돼버린 우리의 옛 리더 모델들, 즉 선비 혹은 군자(君子)와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된다. 군자는 누구인가. 학문은 물론 덕행에 뛰어난 사람이라야 이렇게 불릴 수 있었다.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은 재주가 있어도 원칙과 덕행이 없는 무리, 바로 ‘소인배’였다.

필자는 리더의 모델 중 하나로 중종 때 선비 조광조를 떠올린다. 34세에 관직에 올라 38세에 기묘사화로 희생되기까지 그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유교 이념 복구라는 확실한 ‘목표’로 자발적인 추종자 (전국의 유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의 말에는 항상 무게가 있었다. “조광조가 주장한 것은 그 한 사람만의 생각이 아니라 사림의 공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시대 양반 사회의 양심으로서 활동했으며 자기가 속한 체제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입장을 한시도 버리지 않았다. 그가 조선시대의 사람들에게 길이 기억되는 것은 지성인으로서 취한 일관되고 고고한 행동 때문이었다. (조광조; 정두희 저; 아카넷 간)

한국의 직장인이기 때문에 한국적 덕성이 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신뢰성, 책임감, 언행일치, 열정, 도덕감성, 성실성 등은 서양의 리더십 연구자들도 한결같이 강조하는 리더십 덕목이기도 하다. 리더와 사내정치꾼을 가르는 것은 바로 이런 덕성들이다.

회사를 떠나도 기억되는 그리운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부서만 옮겨도 잊혀지는 평범한 상사로 남을 것인가. 해답은 당신 속에 예전부터 있었다. 신입사원 시절 첫 출근할 때의 설레임에 같이 묻어있었다. 우리는 모두 잠시 그것을 잊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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