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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에겐 일이 전부였다. 새벽에 나갔다가 밤 늦게 들어와 흠뻑 젖은 스펀지처럼 쓰러졌지만 피곤한 것은 단지 몸뿐이었다. 퇴근 후나, 짧지 않은 휴가기간에도 온통 일 생각뿐이었다. 심지어는 퇴근조차 하기 싫을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어느날 갑자기 사표를 내던진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무늬만 가족'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함께 하기 위해 사표를 내던진 노동장관의 이야기는 온 미국사회를 감동시켰다. 그 후에 그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잘 살았다면 너무 시시한 이야기가 된다. 삶은 동화처럼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가족과 함께 하려던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처절하게 망가져 버렸다. 가족을 위한 시간이 그에겐 있었지만 그의 아내는 계속 일해야 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스케줄이 있었다. 자신만 준비되면 가족들은 당연히 함께 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었다.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사춘기의 아이들을 라이시는 '대합조개'라고 불평한다. 영양분을 섭취하고 불순물을 뱉어낼 때만 입을 벌리는 '대합조개'처럼 아이들의 입은 먹을 때와 불평할 때 이외에는 꼭 닫혀 있었다.

새로운 습관에 길들여지기에는 각자의 삶이 너무 바빠져 있었던 것이다. 함께 보내기로 한 주말계획은 아주 간단히 취소되었다. 사춘기의 아이들에게 가족과의 약속은 또래 아이들과의 아주 사소한 재미를 위해 언제든지 포기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 장관을 사임한 그에게 남겨진 것은 텅 빈 주말이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밤 늦게 퇴근해 곤히 자는 아이들의 얼굴을 만지며 "다 너희들을 위해서야"라고 중얼거리는 이 땅의 아빠들이 언젠가는 반드시 겪게 될 운명이다. 이제야 비로소 가족과 함께 할 수 있다고 느낄 때는 이미 늦었다.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에게 섭섭해 "너희들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지 아느냐"고 아무리 우겨봐야 아이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누가 희생해 달라고 했나요?"

바쁠수록 평소에 가족과 함께 무계획적으로 놀아야 한다. 계획된 것은 일이지 놀이가 아니다. 계획된 주말은 아이들에게 일과 의무로 느껴진다. 계획되고 예상 가능한 것은 즐겁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같은 팀이 우승하는 배구수퍼리그가 재미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아빠는 죄책감을 만회하기 위해, 아이들은 의무감에 함께 하는 계획된 주말여행보다는 아무 생각없이 나선 저녁 산책이 훨씬 더 즐겁다.

계획된 미래보다는 예상할 수 없는 현재의 사소한 즐거움에 익숙한 가족이 행복하다. 현재가 즐거운 가족의 아빠는 미래를 약속하며 '희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가족을 위한 희생은 없다. 희생한다고 스스로가 속을 뿐이다. 이는 아이들이 더 잘 안다.


(출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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