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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섬긴 푸른 눈의 어머니




가난과 전염병으로 많은 이들이 고통에 시달리던 지난 1912년,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푸른 눈의 간호사가 찾아왔습니다.
독일에서 태어난 그녀는 미국으로 건너가 간호학 공부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안락한 삶을 뒤로한 채 32살 처녀의 몸으로
조선에 오게 되었습니다.

조선에 도착한 그녀는 조랑말을 타고 자주 전국을 순회하며
한센병 환자를 포함해 온갖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돌보고 다녔으며
자신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큰 년', '작은 년', '지리산 댁' 등으로
불리던 수백 명의 여성에게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렇게 순회할 때마다 온몸에 들러붙은 이를 잡느라
밤을 지새우는 것이 그녀의 삶이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보건의료시설은 매우 열악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녀는 광주 제중병원을 중심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가난한 여인들의 교육에 힘썼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의 수양딸 13명과 나환자 아들 1명 등
14명의 아이를 입양해 기르기도 했습니다.

한센인을 돌보고 고아들을 자식 삼아 살던 그녀는
정작 자신은 끼니를 제때 챙겨 먹지 못할 정도로 궁핍했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돕기 위해 자신의 생활비마저 쪼개어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22년의 세월을 조선에 헌신했습니다.

그녀는 항상 말했습니다.
"내일 나 먹기 위해 오늘 굶는 사람을 그대로 못 본 척 할 수 없으며
옷장에 옷을 넣어놓고서 당장 추위에 떠는 사람을
모른 척 할 수 없습니다."

평생을 누렇게 바랜 옥양목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었던 소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거 또한 사치로 생각했던 그녀는 먹을 것을 줄여가며
모으고 모아 가난하고 아픈 사람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결국에 그녀는 영양실조로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며,
자신의 장기마저도 의학 연구용으로 기증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것은 걸인에게 나눠주고 남은
동전 7전, 강냉이가루 2홉, 그리고 반쪽짜리 담요 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죽자 천여 명에 달하는 장례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어머니'라 부르며 함께 했습니다.
푸른 눈을 가졌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어머니로 살다간 그녀는
서서평(엘리자베스 쉐핑) 선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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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하염없이 고마운 이름




옛날 어느 마을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친구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사형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은 남자는
사형을 당하기 전에 어머니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보고
죽게 해달라고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왕은 남자에게 그럴 수 없다고 하자
남자의 절친한 친구가 나서 자기가 대신 감옥에 들어가 있을 테니
친구를 집에 갔다 오게 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왕은 그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만약 네 친구가 돌아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그러자 그는 기꺼이 자기가 친구 대신 죽겠노라고 대답했습니다.
왕은 결국 그 친구를 대신 감옥에 가두고 남자에게
나흘간의 말미를 주고 풀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나흘째 되는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지만
풀어준 남자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왕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자 보아라, 네 친구는 너를 배신하고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너는 네 친구를 믿고 있느냐?"

왕의 물음에 친구는 대답했습니다.
"네. 저는 아직도 제 친구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는 아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늦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되자 약속한 대로 친구에게 사형을 집행하려고 했습니다.
그때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뛰어 들어왔습니다.
"이제 제가 돌아왔으니 제 친구를 풀어주십시오."

왕이 늦은 이유를 물으니 남자는 말했습니다.
"큰비로 강물이 불어나 도저히 강을 건널 수 없어 늦었습니다.
이제 친구를 풀어주시고 저에게 사형을 집행해 주십시오."
왕은 두 사람의 변함없는 우정과 신뢰에 감탄하여
두 사람 모두 풀어주었습니다.



진정한 우정은 '무색'이라서 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나보다 더 슬퍼하고,
기쁜 일이 있을 때는 나보다 더 기뻐하는 변함없는 친구.
나의 어떠함 때문이 아니라 존재만으로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친구.

인생에서 그런 '진짜 친구'를 얻는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 그런 친구를 기다리지만 말고
내가 먼저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 '진짜 친구'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요?
내가 손을 내밀어야 상대방도 마음을 열기 때문입니다.


출처 : 전국 학원가
글쓴이 : 장성웅원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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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져야 산다




한 수도원에서 나이 많은 수도사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수도사가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는 수도사들로부터 '거만'하다는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수도사가 후배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사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 놓고 젊은 수도사에게
다시 한 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이 뭉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나이 든 수도사가 젊은 수도사에게 말했습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지면 싹이 나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거야.
사람들도 마찬가지야. 우리 역시 부서져야 씨가 뿌려지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거지."



사람 사이의 관계도 마음의 토양이 어떠한지에 따라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 수도, 남김없이 떠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땅이 되십시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각을 세우는 '굳어진 토양'이 아닌
상대를 위해 자신을 부스러뜨리는 겸손한
'부드러운 토양'이 되십시오.


출처 : 전국 학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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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가 절망을 이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국방성 장관이었던 뉴턴 베이커가
한 야전병원을 방문했을 때 심각한 상처를 입은 미군 병사를 만났습니다.
그는 두 다리와 팔 하나, 그리고 한쪽 눈까지 실명한 상태였습니다.
베이커는 안타까운 마음에 한참을 머물며 그를 지켜봤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베이커는 다시 그 병동을 들렀습니다.
그러나 그 병사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병사를 간호하던 간호사와 결혼하여 고국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베이커는 장관직을 퇴임하고
존스홉킨스대학교의 이사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해 박사 학위 수여식 때 베이커는 깜짝 놀랐습니다.
크게 다쳤던 그 병사가 휠체어를 타고 박사학위를 받으러
단상으로 올라온 것이었습니다.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베이커는 그 병사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병사는 베이커에게 짧은 인사를 건넸습니다.
"장관님, 은퇴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직 보람 있는 일이 많이 있으니 기운 내시기 바랍니다."
심한 부상으로 안타깝게만 여겼던 젊은 그 병사가
오히려 베이커를 위로해준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도 인간의 의지보다 강할 수는 없습니다.
포기만 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비극과 절망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역경과 고난이 찾아와도 희망을 품으십시오.
그 상황을 피하지 않고 하루하루 굳은 의지로 헤쳐 나간다면
희망은 현실이 되어 우리 삶에 우뚝 서 있을 것입니다.


출처 : 전국 학원가
글쓴이 : 장성웅원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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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늦은 후회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사무엘 존슨이
무더운 여름날 장터 한쪽에서 몇 시간을 서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어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서서 눈물만 흘리고 있었습니다.

반나절이 지나자 걱정이 된 제자가
스승의 낯선 행동에 대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그러자 사무엘 존슨이 대답했습니다.
"사실은 오래전 우리 아버지께서 이 자리에서 헌책방을 하셨다네...
그날도 아버지는 장사를 위해 일어나셨지만, 몸이 안 좋으셨는지
나에게 하루만 대신 장사를 해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었지."

제자는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그래서 스승님은 뭐라고 대답하셨나요?"

사무엘 존슨은 한참 지나서 다시 말했습니다.
"우리 집이 시장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것도 창피한데
내가 어떻게 그런 일을 하냐면서 거절했다네.
그런데 너무 무리했던 탓인지 아버지는 그날 이후 몸이 약해져서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시고 말았다네.
오늘은 그때의 기억이 지워지지 않아
이 자리를 떠날 수가 없다네."



몇 해 전, 모 금융회사 CF가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젊은 아빠들을 대상으로 몰래카메라를 실시했는데
아이와 하루에 얼마나 시간을 함께 보내는지,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고,
아이의 사진은 지갑에 넣고 다니는지 등등에 관해 물었습니다.
대부분 아빠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반대로 물었습니다.
아이 대신 그 자리에 '부모님'을 넣어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하루에 얼마나 시간을 함께 보내는지,
부모님의 좋아하는 음식은 뭐고, 부모님 사진은 지갑에 넣고 다니는지를요.
그러자 젊은 아빠들은 죄송한 마음에 일제히 눈물을 흘렸습니다.

앞으로 부모님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요?
우린 항상 부모님이 늙지 않고 곁에 있을 거로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곁을 떠나셨을 때 뒤늦은 후회를 합니다.
시간은 항상 멈춰 있는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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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가리지 않는 애국심




자신이 처한 현실이 아무리 작고 초라해도
안창호 선생은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해 '애국'을 실천했습니다.
미국 사회에서 한인들의 성실함을 드러내는 것은
조국의 독립과는 상관없어 보이는 매우 작은 일이었지만,
그것이 대한민국의 이름을 드높이는 작은 첫걸음이라 믿었습니다.

나라를 사랑하는 일은 생각보다 거창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국가대표라 여기며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애국의 첫걸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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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연주는 계속되어야 한다




1782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태어난 니콜로 파가니니는
엄청난 연주와 기교로 전 유럽을 들썩이게 했던
바이올린의 귀재였습니다.

파가니니는 자신의 기법을 신비롭게 하려고
연주법을 비밀에 부치고, 악보조차도 공개하기를 꺼렸습니다.
그래서 파가니니의 화려하고 다양한 연주 테크닉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겨져 있습니다.

파가니니가 프랑스 혁명의 여파를 받아 감옥생활을 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유일하게 바이올린 연주를 위안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었는데,
바이올린 줄이 습기로 썩어서 한 줄만 남게 되었습니다.
교도관에게 부탁했지만, 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파가니니가 있는 방 쪽에서 소리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하게 여긴 교도관의 가보니, 파가니니가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외줄로 연주했지만, 바이올린의 음색과 기교는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훌륭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삶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다 보면 줄이 하나 끊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끊어진 줄처럼
깊은 좌절과 한숨으로 보내야 했던 시기가 있습니다.
중단하지 않은 사람만의 승리할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명언
실패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포기한 자가 패배하는 것이다.
- 장파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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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 참 맛있네




결혼 8년 차인 부부가 이혼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큰 이유는 없는 거 같은데
아내 입에서 이혼하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회사생활과 여러 집안일로 지쳐 있던 남편도 그러자고 했습니다.

부부는 순식간에 각방을 쓰고 말도 안 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대화가 없으니 서로에 대한 불신은 갈수록 커갔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서로가 밉게만 보이기 시작했고,
암묵적으로 이혼의 타이밍만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기를 몇 달.... 남편은 퇴근길에 과일 파는 아주머니를 만났습니다.
오늘은 귤이 너무 달고 맛있다며 꼭 사서 가라는 부탁에
할 수 없이 사서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귤을 주방 탁자에 올려놓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하고 나왔는데,
아내가 가만히 귤을 까먹고 있었습니다.
"귤이 참 맛있네."
몇 개를 까먹더니 방으로 쓱 들어갔습니다.

남편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결혼 전부터 아내가 귤을 참 좋아했는데...
8년 동안 내 손으로 귤을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었네.'

남편은 그 순간 뭔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예전 연애할 때, 길 가다가 아내는 귤 파는 곳이 보이면
꼭 몇천 원어치 사서 핸드백에 넣고 하나씩 사이좋게 까먹던 기억이 났습니다.
남편은 마음이 울컥해져서 방으로 들어가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리고 결혼 후에 아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이 문제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반면 아내는 남편을 위해 철마다 보약에,
때마다 남편이 좋아하는 반찬들을 늘 만들어주었습니다.

며칠 후, 퇴근길에 과일가게 아주머니를 다시 찾았습니다.
남편은 제일 맛있어 보이는 귤 한 바구니를 샀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와 주방 탁자에 올려놓았습니다.
"귤이 참 맛있네"
몇 달 만에 아내가 미소를 지었습니다.



지난해 말, 한 방송에서 배우 차인표 씨가 인상적인 수상 소감을 말했습니다.
그는 50년을 살아오면서 알게 된 진리 3가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 세 번째 진리에 주목해보세요.

"첫째,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둘째,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셋째, 남편은 아내를 이길 수 없다."

작은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작은 일에 감동을 하는 사람이
바로 '아내'입니다.


# 오늘의 명언
사랑하는 사람과 사는 데에는 하나의 비결이 있다.
상대를 변화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샬돈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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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편지




아내를 잃고 일곱 살 난 어린 딸과 단둘이 사는 아빠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빠가 출근하려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예쁜 편지봉투를 쭈뼛쭈뼛 건넸습니다.
"저기 아빠...이거."

엄마가 하늘나라에 간 이후부터 말이 없어진 딸아이였습니다.
아빠는 반가운 마음에 "딸 고마워, 잘 읽을게."하면서
딸의 볼에 입맞춤하고 출근을 하였습니다.

회사에 도착해서는 딸아이가 준 편지는 까맣게 잊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어서 회의준비 등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것입니다.
아빠는 퇴근 무렵에서야 생각이 나서 편지봉투를 꺼내 보았습니다.
봉투 안에는 작은 메모지와 함께 오천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딸의 메모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아빠, 엄마가 없어 힘들지? 아빠 양말 구멍 난 거...
내가 엄마처럼 꿰매 주지 못해서 미안해.
대신 그동안 모아온 오천 원 줄 테니 양말 꼭 사 신어.
아빠 양말 구멍 나면 내가 창피해.
내가 엄마처럼 챙겨줄 테니 힘들어도 울지 말고...
내가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지 알지."



내면 깊숙이 자리한 상처를 공유하고 보듬으며,
치유하는 가장 가까운 공동체, 가족.
삶이 아무리 힘들다 하더라도 가족이 있기에 힘을 낼 수 있습니다.
삶의 보약이자 비타민인 가족과 함께 언제나 행복하세요!


# 오늘의 명언
저녁 무렵 자연스럽게 가정을 생각하는 사람은
가정의 행복을 맛보고 인생의 햇볕을 쬐는 사람이다.
그는 그 빛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
- 베히슈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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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습관




어느 군대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날은 저녁 식사 반찬으로 돈가스가 나오는 날이었습니다.
병사들이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알고 보니 돈가스를 1인당 2개씩 나누어 준다고 하여
신이 난 것이었습니다.

병사들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소스가 없다는 이야기에 이내 표정이 어두워졌습니다.
부식 담당 병사가 실수로 돈가스 한 상자와 소스 한 상자가 아닌
돈가스 두 상자를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저기 병사들의 불평이 들렸습니다.
"맛도 없게 소스도 없이 돈가스만 2개를 먹으란 말이야?"

그때 한 선임병이 말했습니다.
"다들 그만 불평하자. 분명히 어떤 부대에서는 지금쯤
돈가스 없이 소스만 2인분 먹고 있을 거야."



비슷한 다른 상황에서 우리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불평을 택할 것인가, 감사를 택할 것인가...
항상 불평하는 사람은 감사할 일에도 작은 불평을 하고
항상 감사하는 사람은 불평할 일도 감사합니다.
결국, 불평하는 것도 습관이고, 감사하는 것도 습관입니다.
그러니 감사를 습관으로 하루를 살 수 있다면
너무 멋진 인생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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